어린 시절부터 난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책임감에 허우적거려왔다.
이후 그 책임감은 내 삶에 깊이 각인돼 60 평생을 나와 함께 했다고 믿는다.
난 평범하지 않은 환경에서 태어났다.
그 중심엔 할아버지 뻘 되는 아버지가 있었고, 척추장애인이신 어머니가 있었다.
그마저 아버지는 가끔 집에 들렀기에 어린 나이임에도 어렴풋이 난 내 환경이 뭔가 이상하고 다른 집과 많이 다르다는 걸 알게 됐다.
난 외삼촌과 어머니와 살았다. 물론 내겐 여동생도 있었고,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해주는 언니도 있었다.
내 기억에 외삼촌은 날 무척 아끼고 사랑했지만(때를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있던 날 위해 자전거를 타고 어머니 젖을 짜 배달해줬다고!), 사랑을 제대로 표현할 방법을 배우지 못했던 외삼촌은 자기 뜻이 전달되지 않으면 화부터 냈던 걸로 기억된다.
해서 밥을 먹다가도 어머니와 고성이 오가곤 했다. 맛있는 반찬을 자기에게 건네주는 누나에게 난 됐으니 누나 먹으라고 건네줬고, 그걸 거부하면 화를 냈던 거 같다.
하지만 데이트 때 날 대동하고 나갈 만큼 나에 대한 애정은 특별했다고 기억하고 있다.
내 어머니 역시 부모님으로부터 제대로 된 가정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기에(조실부모 후 대신 외할머니가 있었는데 내가 느끼기에 그분은 독단적이고 많이 편파적이었던 분이었던 거 같다.) 주변인들로부터 혹은 혼자 독학으로 대부분 배웠다고 알고 있다.
내 아버지에 대해선 별로 아는 게 없다. 말을 타고 다니고 종로통에서 꽤 행세하셨던 멋쟁이 정도, 그 시절 요정의 여인들이나 창을 부르는 여인들의 흠모의 대상이었다는 그 정도. 해서 아버지는 노래와 마작, 풍류를 즐기는 풍류가객인 걸로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
내가 다른 이들처럼 '엄마'라고 하지 않고 말을 배운 그때부터 '어머니'라고 하게 된 건 순전히 우리 어머니의
조기교육 덕(혹은 탓)이었다.
장애가 있을지언정 그 어느 누구보다 내 자식을 잘 키워내고 싶었던 내 어머니의 바람 혹은 욕심에서 기인한 교육관 말이다.
그 어린 나이에 엄마 대신 어머니라고 칭하는 날 보고 어른들은 깜찍하고 어른스럽다며 깜짝 놀라곤 했다. 물론 3년 뒤 태어난 내 동생도 마찬가지였고.
그 외 우리 어머니의 조기교육은 끊임없이 이어져 그 시절 초등학교 가기 전 한글을 다 뗀(야단맞으며, 때론 매도 맞으며) 건 물론 산수도 어느 정도 했고, 고전 무용단에서 활동해 TV에까지 얼굴을 비춘 적도 있었고, 리틀 미스 코리아에도 출전해 당선되는 등 다방면으로 딸의 능력을 계발하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그밖에 우리 어머니의 교육관 중 하나는 연대책임이었다. 마치 군대처럼, 내 잘못은 동생까지 연결되지 않지만 동생의 잘못은 어김없이 내게 연결돼 함께 혼을 냈다.
아주 어렸을 땐 기억나지 않고 초등학교 때부턴 어김없이 이 '룰'이 적용됐다고 기억하고 있다.
해서 초등학교 5, 6학년부터는 동생이 방학숙제를 하지 않아도 그 책임은 내 것이 됐다. 언니가 돼서 동생 안 돌보고 뭐 했느냐고 책망을 듣거나 함께(물론 내가 더) 매를 맞았다.
아마 이때부터일 것이다. 내게 동생은 단순한 동생이 아니라는 걸 나 스스로에게 깊이 각인시키게 된 건.
그러다 그걸 더욱 확실하게 되잡게 된 계기가 있었다.
내가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교실 스피커로 6학년 이 00, 3학년 이 00 빨리 집으로 가라는 전갈을 받은 나와 동생은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 버스 안에서 난 아버지의 죽음을 예감했고, 그 순간 이제 내 동생에게 난 아버지 역할을 해야 한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이후 동생 대신 매를 맞아도, 어머니의 잔소리가 동생이 아닌 내게 쏟아져도, 당연하다는 듯 아무 원망 없이 그걸 받아들였다.
물론 그 나이 또래 할만한 잘못이나 어리석은 행동도 했었지만 대체적으로 조숙한 아이로 난 성장 해갔다고 믿는다. 또한 몸 불편하신 어머니를 도와야 하고 실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내게 하나의 당위성으로 자리매김했다고 기억한다.
이렇게 난 또래에 비해 생각이 많고 사색하는, 많이 조숙한 아이로 성장할 수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내게 지워진 의무, 책임감의 무게가 날 짓눌렀지만 그걸 미처 깨닫지도 못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그런 또 다른 나 같은 <책임감>과 함께 난 자랐고, 책임감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내 삶의 화두가 되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엔 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려 했고, 졸업 후 취업해선 내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려 했다.
당연히 집안에선 맏딸로서의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고, 결혼 후엔 아내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책임을 다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뭐가 됐든 넘침은 부족함만 못 한 법!
과부하가 걸린 책임감은 때론 격하게 내 자의식을 때리며 날 힘들게 했다.
'이 삶은 과연 누굴 위한 삶이지? 내 삶은 어디에 있지?'
한창 살기 급급할 땐 미처 깨닫지도 못했다. 아니, 그냥 가슴 한편에 숨겨 놓았었다. 그렇게 애써 모른 척하려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시간이 가면서, 엄밀히 말해선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면서, 슬슬 돌파구를 찾기 시작했던 거 같다(아니 그랬을 것이다!).
내 모든 책임감을 훌훌 털 수 있는 방법, 그건 바로 여행이었다!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고, 나만 책임지면 되는 홀가분한 순간들의 연속!
그게 내가 그토록 여행에 목매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책임감으로부터의 탈출 혹은 도피! 무의식적으로 나 스스로를 보호하고픈 하나의 몸짓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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