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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지중해 크루즈 이야기 12('바다항해'만 하는 날의 일상)

번잡함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끔 이렇게 사람들의 합심을 느끼는 것도 즐거움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다음날, 그리스를 떠나 다시 모항지인 이탤리로 향한 크루즈는 온종일 바다에 머물렀다.

일명 '바다항해날'(Sea Day)을 두 번째 맞게 된 거다.

이때까지만 해도 바다항해날엔 드레스 코드가 '이브닝 쉬크'이고, 그게 일종의 '포멀' 드레스 코드에 가깝다는 걸 몰랐었다.

그말인즉, 언젠가 포멀 드레스 코드가 있겠지 하고 난 가져간 의상 중 가장 화려한 의상을 여전히 아껴두었다는 얘기다.

해서 그날도 난 말 그대로 쉬크한 분위기의 검정원피스를 입었는데, 그러고 보면 '이브닝 쉬크'날 입었던 드레스는 모두 검정색이었다는!(사실 가장 화려하다는 드레스 역시 롱드레스에 크리스탈과 은박이 박힌 검정색이긴 했다.)

 

그건 그렇고, 다시 바다항해날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날은 맘 잡고 아침식사를 정찬식당에서 하는 걸 필두로 그 전에 눈뜨자마자 나는 다른 이들처럼 수영장으로 달려가 '가제보' 하나를 먼저 맡아놨다.

아침식사 후 산책을 한 다음 그곳에서 색다른(? 우린 보통 조용한 실내 수영장이 있는 솔라리움에서 휴식을 취하곤 했었다. 야외 수영장은 좀 더 시끌벅적한 분위기라서 말이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우리의 가제보 위치가 수영장과 자쿠지 바로 앞이라 접근에도 용이했지만, 승객들의 다양한 모습과 표정을 살펴보기에도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그 결과 승선 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 눈에 담아보긴 처음이었다.

 

여기저기 눈길을 돌리고 있는데 잠시 후 수영장 앞에서 게임을 한단다. 콩주머니 같은 걸 던져 구멍에 넣는 게임이었는데 순간 장난끼가 발동하면서 그 게임에 참가해보고 싶어지는 거다. 해서 난 남편에게 게임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내 이름을 참석자 명단에 올렸다.

 

한 두번의 연습게임 후 곧 게임이 시작됐다. 연습 땐 조금 앞에서 가능했지만 실전에선 정확히 줄 뒤에 서야 한단다(미리 말을 좀 해 줄 것이지. ㅎ). 떨리지는 않았지만, 연습때보다 훨씬 실력이 받쳐주지 못했다. 고로 결과는 뭐 뻔할 뻔자로 끝나고 말았다는 슬픈 소식을 전한다.ㅠ.ㅠ

 

남편이 동영상을 찍겠다며 뭔가 하는 듯싶었는데 그 역시 결과는 미미, 아니 전혀 촬영도 되지 않은 '제로'였다.

하지만 그게 우리의 기분을 바꿀 순 없었다. 촬영이 안 된 게 뭐 대순가. 우린 후에 수영장 근처에서 벌어지는 크루멤버들의 행진과 수구를 구경하며 모처럼 혼잡함을 즐겼다.

 

 

그리고 '스파카페'에서 점심식사 후 또 탐색하기 위해 뷔페식당에 들러 멋지게 장식되어 있는 다양한 케이크를 구경하곤 유혹에 못 이겨 케이크를 맛봤다. 또한 그날 따라 눈에 들어왔던 '용과'(Dragon Fruit)와 복숭아, 자두를 방으로 가져와 입가심까지 한 다음, 잠깐 룸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날 밤 드레스 코드는 이미 말했던대로 '이브닝 쉬크'. 모처럼 남편 역시 정장을 입고 우린 저녁 정찬을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그 전 클래식 듀오가 선사하는 멋진 선율을 잠깐 감상한 건 안 비밀이다!

 

그날의 메인 메뉴는 '랍스터 테일'. 평소 해산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남편도 그날만큼은 랍스터 테일을 주문했고, 우린 리조또 하나를 추가해 함께 먹었다.

그리고 디저트로는 '시트러스 룰라드'(Citrus Roulade) 라는 라스베리 소스를 곁들인 바닐라 롤과 '포치드 페어'(Poached Pear)라는 말린 과일과 바닐라 아이스크림, 요구르트를 곁들인 복숭아를 택했다.

 

 

물론 맛과 프리젠테이션 모두 아주 훌륭했고, 우린 가벼운 마음으로 대극장으로 향했다. 

그날의 공연은 밥 르위스라는 가수였는데, 80년대 유명했던 필 콜린즈의 노래로 무대를 꾸몄고, 필 콜린즈처럼 노래뿐 아니라 드럼까지 연주해 많은 이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공연 후엔 늘 그렇듯 갑판으로 올라가 지는 해를 바라보며 바다와 하늘과 나를 일치시키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누가 내게 크루즈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게 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치 않고 대답할 것이다.

 

"바로 바로 최고의 경관을, 그 중에서도 일출과 일몰, 산등성이와 수평선, 순간 순간 변하는 섬세한 물결과 물빛을 최대 화면으로 내 눈뿐 아니라 내 가슴에 담았던 그것이죠!"라고 말이다.

 

그건 그야말로 날마다 느꼈던 감동을 넘어선 환희였고,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자연과의 진정한 교감이었다.

 

이렇게 또 하루가 지나갔다.

이걸 압축해 바다에서 항해만 하는 날의 일상을 정리하자면, 맛있는 식사 후 편안하고 오롯한 마음으로 현재를 즐기다 멋진 의상을 차려입고 세련된 분위기의 식당에서 흡족함을 느끼며 식사를 마치고 열정을 선사하는 쇼를 관람한 후 멋진 바다와 하늘을 감상한다! 정도가 되겠다.

 

해서 다른 날이 아닌 오롯이 바다에서 쉴 수 있는 날은 시간적, 심적 여유로움이 극대화되니 좀 더 여성들이 치장할 수 있는 '이브닝 쉬크' 드레스 코드를 부여한 게 아닌가 싶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건 그저 내 생각이 아니라 사실에 가까울 확률이 아주 높다는 말로 오늘의 이야기를 마칠까 한다.

내가 봤던 수많은 멋진 일몰 중에서도 특히 찬란했던 그날의 일몰 사진을 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