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온전하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내일 다시 로마 치비타베키아 항구로 돌아가 하선을 해야 한다.
그것도 아침식사를 일찌감치 마치고 오전 9시 이전에 말이다.
'벌써 마지막 날이 되다니!~ 믿을 수 없군!'
남편의 마음도 나와 같았을 것라 여겼던 짐작은 여지없이 맞아 들었다.
어떻게 알았냐고? 아침부터 남편의 표정이 좋지 않았으니까.
대충 20년 이상을 함께 살다 보면 그 사람의 표정과 어투에서 그 사람의 심리상태가 보인다(고 믿는다).
그날 남편은 기항지를 둘러보는 것조차 싫다고 했다.
사실 나 역시 마지막 기항지인 '리보르노'(Livorno)에는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승객들은 이곳에서 주로 피사나 피렌체로 선택관광을 택하곤 한다는데, 그러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피사는 전혀 관심 밖이었고 피렌체는 왕래시간만 거의 4시간이 걸린다니!)고 여긴 우리는 이미 맘을 정했었다. 이곳에선 잠깐 타운만 둘러보고 배로 금방 돌아와야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조차 싫다는 남편을 굳이 설득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해서 우린 하루종일 배에서 지냈다.
수영장을 오가며 구경만 했던 실내 가제보에서 뒹굴거리기도 하다가, 실내수영장 '솔라리움'에서 수영도 하다가 하면서 마지막날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중간중간 난 어두운 남편의 표정을 살피며 위로도 했는데 "괜찮아?"하고 물으면 남편은 어김없이 입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위로랍시고 내가 "괜찮아! 한달 보름 후에 우리 또 다른 크루즈 여행 갈거잖아! 내일 로마로 돌아가서 여기저기 구경도 할 거구."라고 해도 남편은 맘 상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장난기가 발동한 내가 남편에게 "당신 이번 크루즈 여행에서 뭐가 제일 좋았어?"라고 물었더니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짓던 남편 왈 "음식!" 이러는 거다.
그리 식탐이 많지 않은 남편이지만 음식이라고 대답하는 이유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난 그의 머리를 쓰담쓰담해줬다.
매일 조금씩 마시던 와인과 오렌지쥬스도 끊고 열심히 운동에 매진했던 남편이 '휴가' 기간 중에만 즐기는 일종의 반란(?)을 이미 여러 번 목격(여행 중엔 평소 참았던 음식들을 폭풍 흡입까진 아니어도 나름 탐닉해왔다.)해서이기도 하지만 그의 슬픔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서였다.
그러다 보니 장난을 치려던 내 마음에도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만약 내게 누군가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난 뭐라고 대답을 하게 될까?
"당신은 이번 크루즈 여행에서 뭐가 제일 좋았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난 이렇게 대답을 하게 될 거 같다.
"모든 책임감에서 잠시라도 벗어난 거? 그리고 매일 새로움을 기대하며 눈을 뜨고 새로운 걸 경험한 거? 거기에 거의 매일 파노라마 뷰로 떠오르는 태양과 지는 해를 감상한 거?"
'그거로구나! 우리가 어딘가로 떠나는 목적은 결국 책임감 혹은 억눌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로구나!'
그게 그저 심리로든, 실제 행동으로든 뭐가 됐든 일종의 현실 회피, 도피, 보상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게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그런데 이렇게만 생각하는 건 너무도 자의적 해석이란 깨달음이 또 문득 머릴 때렸다.
인생 자체가 생로병사의 과정이라고 여기는 나 같은 사람(난 스스로를 낙천적 허무주의자라 정의하고 있다!) 이나 늘 스트레스에 짓눌려 있는 남편 말고 어떤 사람의 입장에서는 현실에서 어려움이 있을 때 거기에 맞서기 위해 여행을 떠날 수도 있으리라. 일종의 헝클어진 머릿속을 정리한 다음 상황을 재정비 강화하기 위해 시간을 버는 셈일테지.
또 어떤 이는 그저 즐거움을 찾고자, 새로운 경험을 쫓아, 여행을 계획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다 결심했다.
다음 크루즈 여행에선 이번 여행과 조금은 다른 뭔가를 계획해보자고, 일종의 정리의 시간을 가져보자고, 좀 더 내 안의 소리에 귀기울여 보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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